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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유방암 투병기

[항암일기]나의 항암치료 중 활력소, 강아지

by 정이모음 2021.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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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항암치료를 하던 대구 집에는 말티즈와 사모예드의 예쁜 믹스견인 댕댕이 1마리를 키웠다.
말이 좋아 믹스견이지 '앉아, 일어서!'도 못 알아듣는 영락없는 똥개이다.
뭐.. 그런 거 안 가르친 주인 탓이지..

 

이름은 개영심이다.
영심이를 집에 데려올 때 원래 우리 가족들은 영심이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예쁘게 지어주려고 했다.
근데 2년정도 다른 주인이 키우던 개라서 그런가 영심이라는 호칭에 유난히 반응을 했다.

 

결국 이름 바꾸기는 실패했고, 남동생의 이상한 심술에 의해 개영심이라고 부르게 됐다.
성격도 너무 소심해서 사교성도 없지만 산책을 좋아하고 우리 가족에게는 늘 웃음을 주는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내가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됐고, 요양을 대구 집에서 하다 보니 할머니 입에서 환자 옆에 개가 웬 말이냐며 자연스레 강아지를 다른 곳에 보내자는 말이 나왔다.
아빠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안 그래도 아픈 애가 우울증이다 뭐다 해서 더 힘들어지는 걸 봐야 속이 시원하십니꺼? 
애가 강아지랑 같이 있고 싶다는데 와 자꾸 그러는 교?
사람 몸이 약해지면 예민하고 짜증 나기 십상인데 하루 종일 옆에 간호하고 화풀이 받아 줄 거 아니면 가만히 냅두소.

엄마의 말이 맞았다.
말이 좋아 집에서 요양이지 실상은 가족들이 아침을 먹고 나가면 이 집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건 나 혼자였다.
다들 자기 생활이 있으니 좀 더 시간을 쪼개서 나의 상태를 신경 쓰는 거지, 내 옆에서 온종일 나만 바라보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다른 환자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투병 생활을 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가 긴 고통의 시간이었다.
아픈 환자에게서 나는 특유의 냄새, 그리고 누구 하나 당당히 웃을 수 없는 분위기와 어두운 대화들..
더욱 힘든 건 나 하나로 점점 지쳐가는 가족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가족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아팠지만 집이 불편했고, 자꾸 나만의 동굴을 만들어 들어가려 했다.

 

그나마 영심이를 안고 있으면 그 동굴 속이 조금은 따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영심이를 참 많이 의지했나 보다.
밤에 잠 못 자고 화장실 앞에서 쭈구려 앉아 혼자 힘들어할 때도 유일하게 내 옆을 지켜 주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몸에 손가락 하나 제어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자꾸 움직이는 게 귀찮고, 누워 있고만 싶었다.
맘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이 늘었고, 답답해서 혼자 벽을 보고 소리 지르는 날도 늘어만 갔다.

 

그럴 때마다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옆에 오는 영심이가 너무 귀찮았다.
따라오지 말라고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차갑게 밀쳐내기도 했고, 방문을 닫고 거실에 혼자 두기도 했다.

 

이런 내가 뭐 그리 좋다고 아련한 눈빛으로 애교를 부리면서 굳이 옆에 있으려고 하는 건지...
그럴 때마다 비 오는 날 미친년 널 뛰는 듯한 감정 기복은 안정이 되어 이내 진정이 되곤 했다.

그러나 공짜는 없다.
2012년 겨울.
대구는 눈도 비도  보기 힘든 곳인데 그땐 유난히 함박눈이 많이 내려 하얀 길을 자주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의 개영심은 자비가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아프고 귀찮다 할지라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1시간 이상 산책 겸 걷기 운동으로 영심이와 함께 나가야만 했다.
개영심이 흙냄새를 맡으면서 놀면 나는 서서 기다리고, 개영심이 뛰면 나도 그냥 뛰는 거다.

 

솔직히 가족들이 좀 도와주겠거니 했는데 예뻐할 때 빼고는 목욕과 뒤처리들은 모두 내 일이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지긋지긋한 투병생활보다 눈이 내리던 날 영심이랑 뛰어다니고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에 씻은 후 전기장판 위에서 같이 귤과 고구마를 까먹던 기억이 더 선명한 건 왜일까..??

 

집에서 먹고 자는 일만 반복했을 나의 텅 빈 하루들을 채워준 큰 활력소였다.
지금은 우리 가족 모두가 영심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항암치료를 하는 환자들 중에 반려견 문제로 가족들과 갈등을 겪는 환자들을 많이 봤다.
보호자들은 위생상 더럽다고 반대하고 그럴수록 환자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더 집착을 했다.
내가 한 번 겪어보니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상태가 아니라 걸어 다닐 정도라면 오히려 반려견의 존재는 위생이라는 반대 이유 하나를 완전히 무시해도 좋을 만큼 더 큰 활력을 나에게 준다.

 

암 환자에게는 그놈의 활력이 정말 하루하루 중요하다.
누군가는 항암치료를 하면서 그 활력을 가볍게 알바나 직장 생활로 가능하다고 하지만 이건 정신 나간 소리다.
이건 아직 숨 쉬고 살아있는데 그 사람의 장례식을 미리 치르자고 고사 지내는 것과 같다.
돈 버는 일은 스트레스, 집에서의 요양하면서 혼자만의 시간은 정신적 박탈감과 외로움의 싸움이다.
위생 둘째치고 뭘 해도 안 해도 문제다.
그러니까 암 환자인 것이다.

 

방법은 개인적으로 다 다를 수가 있지만 나는 다행히 영심이가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였고, 그 활력을 얻어 나름 그 틀 안에서 소소한 취미로 생산적인 생활을 하나 둘 만들어 가는데 썼다.
밤새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완치 후 해외여행을 꿈꾸며 외국어를 공부했고, 크리스마스에는 캐럴을 부르며 스스로 장을 보고 요리를 해먹고, 명작이 그려진 퍼즐 맞추기를 집중하느라 통증을 잊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꽤 나쁘지 않은 시간들이었지만, 영심이에게는 꽤 지루했을 것 같다.
그래도 참 잘 버텼다.

영심이는 올해 16살의 노령견이다.
산책을 나가도 걷기 힘들어하고, 피부도 엉망에 약간의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다.
슬슬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힘든 날 선명한 추억들이 많아 그 마음의 준비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아직은 밝고 씩씩하게 살아있으니 늘 감사함을 느끼지만 더 오래 있어줬으면 하는 건 나의 욕심이겠지?

우리집 최고 상전 개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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