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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유방암 투병기

[항암일기]항암주사 보름 후, 나는 빡빡이가 되었다.

by 정이모음 2021.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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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말.
제법 쌀쌀함이 느껴지는 가을이었다.
몸 상태는 항암주사 3일 후부터 엄청나게 나빠졌고, 나름 소소하게 계획한 것들을 하루 이틀 빼먹게 되는 몸뚱이의 상태는 도저히 어찌해 볼 방법이 없었다.

 

나는 너무 예민해져 있었고, 매일 내 육체는 정신과의 싸움에서 졌다.
그래도 강아지와의 외출은 빼먹지 않았고, 산책을 하고 오면 그나마 약간의 힘이 붙긴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정확하게 항암주사를 맞은 지 보름이 되던 날.
미용실 원장님이 잘 정리해 준 내 머리 스타일에 변화가 왔다.
이상하게 하루 전부터 머리 두피가 욱신거리더니 머리에 손을 대는 순간 정말로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이 연출됐다.
머리카락이 한 주먹씩 쑥 빠졌다.

 

나는 왼쪽 주먹에 빠진 머리카락 한 뭉치를 쥐고서 어쩌지 어쩌지 하며 10분 정도 가만히 서있었다.
잠시 앞이 보이지 않아 캄캄했다가 조금씩 시야가 흐리게 돌아왔다.

마침 움직이지도 못한 채 굳어져 버린 내 종아리를 강아지가 계속 긁어대는 바람에 정신도 돌아왔다.
나는 천천히 움직여 부엌에서 까만 비닐봉지를 찾았다.
빠진 머리카락을 담고 다시 머리에 손을 대서 빗질을 몇 번 했더니 이제는 작정하고 뭉치로 빠졌다.
너무 많이 빠져서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거실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미 병원에서도 충분히 안내를 받았기 때문에 담담하게 빡빡이가 될 준비를 며칠 하지 않았는가?
그래도 정신을 딴 곳으로 분산해야 했다.
이게 준비한다고 준비가 되는 마음이 아닌 것 같았다.

 

TV를 켰더니 런닝맨 재방송이 나오길래 애써 웃으며 다시 머리를 손으로 살살 쓸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이광수와 김종국의 투닥거림에 빠져 정말 재밌게 보고 있는데 마침 엄마가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왔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더니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카락이 담긴 비닐봉지를 보았다.
그러고 나서 엄마도 함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렇게 몇 차례를 반복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나의 웃음소리 옆에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옆을 보니 엄마가 울고 있었다.
나는 이 타이밍에 사태 파악 못하고 TV 보며 웃고 있는 철부지가 되어버렸다.
마음의 준비가 잘 안되는 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래도 머리카락은 끊임없이 빠졌다.

 

민머리가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는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몰골은 뒤통수가 예쁜 민머리가 아닌 반지의 제왕 골룸의 실사판이었다.
목소리만 저음으로 속삭이면 분장 없이 공포영화도 찍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아직 힘이 남아 군데군데 뽑히지 않은 머리카락은 거의 10%도 안되는 거 같았는데 오히려 그게 더 흉측스러웠다.
내가 봐도 거울 속 내 모습이 참 싫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힘들진 모르겠지만 무서웠다.
눈물이 안 나왔다면 거짓말이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얼른 심호흡 몇 번 하고 입꼬리를 세 번 억지로 올려본 후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엄마는 아직 그 자리에서 내 머리카락이 담긴 검은 봉지를 꼭 안은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흐느꼈다.
이대로 내 하루를 다 흘려보낼 순 없었다.
나는 얼른 방안으로 뛰어가 며칠 전에 샀던 비니 모자를 쓴 채 다시 엄마에게 말했다.

나 모자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치?

엄마는 얼른 눈물을 닦고 손으로 내 비니 모자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래, 잘 어울리네. 우리 맛있는 거 먹자.

그날 저녁.
나는 어지러움이나 구토 증상 없이 평소보다 편안하게 밥도 먹고 고기도 잘 소화시켰다.
자기 전에 샤워를 할 때 머리카락이 좀 더 빠졌지만 이때도 완전히 빠지지는 않았다.
잠자리에 들 때도 혹시나 빠질까 봐 비니를 썼다.

 

근데 막상 베개에 머리가 닿으니 두피가 너무 욱신거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이 너무 한꺼번에 뿌리까지 다 빠져서 그런 걸까?  
왜 이날따라 밥도 잘 먹고 왜 덜 아픈 걸까 했더니 두피에 엄청난 통증이 왔다.

 

그럼 그렇지..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구나..

결국 밤새 이를 악물다 새벽 6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는데 해가 중천에 뜬 11시가 넘어서도 내가 안 일어나니 할머니가 나를 깨웠다.
점점 게을러지고 있다고 점심때까지 늦잠이 뭐냐고 잔소리를 한바탕하셨다.

 

하지만 나는 너무 귀찮고 피곤해서  밥 대신 주스를 갈아먹고 다시 잠들었다.
내가 밤에 증상이 어떤지 언제 잠이 드는지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들은 잘 몰랐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밤에 이래서 아팠고 저래서 죽을 것 같았다.' 같은 부정적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징징댈 힘도 없었고..

 

이게 첫 항암주사인데 처음부터 이러면 다음은 더 힘들 텐데 내가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삼일이 더 지나니 나는 완전히 민머리가 되었고, 날씨가 추워 모자를 2~3겹씩 쓰고 다녔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어릴적 엄마와 나 (머리 빠질 적 사진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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