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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유방암 투병기

[항암일기]첫 항암 치료를 받던 날

by 정이모음 2021.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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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서울 자취방

2012년 10월 19일.
3년을 넘게 지낸 정든 서울 자취방을 정리했다.

 

이제 겨우 방 꾸미는 재미를 들여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가구, 소품, 가전기기, 잡화들 모두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처음 부동산 아저씨와 신발을 신고 둘러봤을 만큼 아무것도 없던 방이었다.

비가 오던 어느 날,

한기가 가득했던 이곳에 힘들게 이사를 하고 바닥 청소를 3번이나 해도 좋았다.
이 빈방을 내가 하나둘 만들어갈 생각에 설렜다.

 

그리고 정말로 조금씩 돈을 모아 계획대로 하나둘 채워질 때마다 성취감도 느꼈다.
모두 나의 흔적과 온기로 가득한 나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흔적들은 며칠 만에 하나둘씩 사라졌고 그때마다 내 가슴은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다시는 이 생활로 못 돌아올 거라는 생각에 손만 떨며 처음처럼 다시 서늘해진 빈방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날 내 보호자였던 동생은 아침부터 급히 밥을 먹고는 빨리 병원으로 가자고 재촉만 할 뿐이었다.
모든 게 급했고 나보다 더 긴장해서 예민했다.
우리는 병원으로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 출퇴근 시간이라 1시간 정도 걸려 삼성서울병원 암센터에 도착했다.

환자 접수를 했더니 어디선가 병원 직원이 나타나 1일 전용 휠체어를 주었다.

뭐지? 항암 치료를 받으면 못 걸어 다니는 건가?

직원은 굳이 사지 멀쩡하고 잘 걸어 다니는 나를 휠체어에 태워 이리저리 함께 다녔다.
이전 검사 때 결과에서 나의 왼쪽 가슴 암덩어리는 5.4cm로 제법 컸다.

내 주치의 선생님은 항암 치료를 먼저 해서 암세포를 먼저 줄인 후에 수술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근데 항암 치료에 대해 무지하다 보니 무서운 것도 없었고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나는 모르는 게 왜 이리 많은지 스스로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호사와의 면담을 나누고 주치의가 내 혈관 상태를 체크하고 다니다 보니 어느샌가 수술 침대에 누워 나의 오른쪽 겨드랑이 밑 팔뚝에서 혈관을 타고 심장까지 들어가는 투명한 튜브를 하나 심었다.
혈관 상태가 좋지 못한 환자들이 수액을 편히 맞기 위해 '말초 삽입 중심정맥관'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갑자기 팔뚝에 얇고 긴 빨대가 하나 생겨나서 외관상 너무 보기 싫고 적응이 되지 않아 짜증이 났지만 항암제가 워낙 독성이 강해 한 방울이라도 잘못 튀면 피부가 다 상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차라리 잘 됐다 싶기도 했다.

 

사실 항암 하는 동안 이 튜브를 삽입한 게 다행이다 싶을 만큼 너무 편하게 치료를 받았다.
이거 안 했으면 아마도 내 손등 팔뚝에 주삿바늘 자국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병원 직원은 마지막 목적지인 6인실 병동으로 나를 데려다주고 또 다른 환자를 위해 사라졌다.

 

나는 침대 위에 있던 환자복으로 완전히 갈아입고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침대에 앉았는데 이상하게도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보니 병실 안의 환자와 보호자들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른 침대에 보호자 한 분이 내 나이를 물었다.

 

그랬다. 
내가 이 6인실 병동에서 그나마 제일 어리고 활기 넘치는 환자였다.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들은 젊은 나이에 벌써 아프냐며 안됐다는 말을 했지만 나는 그 말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내가 검사하던 날 다른 환자들을 그런 눈으로 보며 느꼈던 것들..

'괜찮아.. 난 적어도 저 사람보다 덜하니까...'

게다라 옆 침대 보호자는 나에게 충고를 가장한 폭력적인 위로를 던졌다.

어쩌다가 20대에 암 걸려서 이런 곳을 왔대?
먹는 거 맨날 인스턴트 먹었지? 거봐, 그러니까 병 온 거야!! 요즘 애들 그게 문제야...
밤새우고 운동도 안 하지? 어쩜 좋니.. 건강 관리 미리미리 잘했어야지!!

그러게 말이다.
내가 어쩌다가 암에 걸려서 생전 처음 보는 아줌마한테 저딴 소리를 듣고 있는지 화가 났다.
먹고 있던 요구르트라도 하나 주면서 그런 소리를 하던가..

 

떠드는 것도 공짜라고 잔소리를 어찌나 퍼부어대던지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숙연해져 버렸다.
첫 치료라고 씩씩하게 받고 싶었는데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동생이 사 온 빵과 우유를 먹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는 아줌마의 잔소리 폭격에 죄인이 된 것 같았다.

 

마침 항암제 투여 전 나의 정신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상담사가 왔다.

물어보는 것마다 생각보다 조금은 더 긍정적으로 대답했더니 상담사의 결론은 아직은 본인이 환자라는 현실 직시를 못해서 지금의 상황을 믿고 싶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솔직히 회사를 정리하고, 집을 비우고, 팔에 관을 꽂고 침대에 누워 있어도 뒤죽박죽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상담사는 슬픈 드라마가 아니라 인생역전 드라마의 첫 에피소드를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자고 했다.

아줌마의 잔소리로 날뛰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 이후 영양사, 약사, 인턴 의사가 줄줄이 나에게 왔다 갔다.
마지막으로 담당 간호사가 왔을 땐 이미 내 튜브에 항암제 수액을 줄줄이 달며 이런 말을 했다.

푹 자는 게 좋아요, 주무세요.
깨어있으면 갑자기 구토 증상이나 어지러움을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딱히 졸리지는 않았는데................. 잠이 들었다.
빨간 수액, 투명한 수액 모두 합쳐 6 봉지를 넘게 맞았나?
수액을 맞는 동안 단 한 번을 안 깨고 잔 걸 보니 역시나 그 안에 수면제도 들어 있었다.
거의 3~4시간을 넘게 맞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다른 환자들은 퇴원하고 나만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위장이 답답하고 옥죄는 느낌이 들었다.

동생의 부축을 받으며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가는데 그 길이 어찌나 긴지 계속 졸았다.
수면제가 꽤 강했나 보다.

 

동대구에 마중 나온 엄마의 차에서도, 집에 도착해서 씻고 나서도 비몽사몽 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냥 그렇게 치료 첫날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잠들면서 중얼거리며 다짐했다.
이제부터는 장기전이다.

 

파이팅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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