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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유방암 투병기

[항암일기]유방암 판정을 받은 날, 그 첫 기억

by 정이모음 2021.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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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 내 나이 만 25세였다.
왼쪽 가슴에 딱딱한 돌덩이가 잡혔다.

 

사실 멍울이 만져진 것은 6개월도 훌쩍 넘었다.
아무리 잠을 자고 쉬어도 몸은 항상 피곤했고, 늘 몸살과 감기를 달고 살았다.

 

살이 10kg 가까이 쪘고, 매일 아침 세수를 할 때마다 코피가 펑펑 났다.
어찌나 피가 많이 나는지 세수할 때마다 세면대와 얼굴 전체가 피범벅이었다.
한 번씩 찾아오는 멍울의 통증은 엄청난 고통이었고,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혹시 이게 유방암인가 싶어서 혼자 인터넷을 뒤져가며 자가 진단도 했다.
수많은 증상들이 겹쳤고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도 병원을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병원에서 정말로 유방암 판정을 받음과 동시에 20대에 암 환자라는 낙인이 너무나도 두려웠고, 주변 또래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회생활을 할 나이에 나 혼자 도태되어 병실에서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만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일에 빠져 살았기 때문에 회사 일로 바쁘다는 핑계는 병원을 안 가도 되는 좋은 변명거리였다.
만성 피로와 감기, 멍울의 통증, 코피 증상은 있었지만 실제로 6개월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었다.

 

젊은 나이이지 않은가?
사회와 단절된 삶은 곧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쓸모없다고 인정해버리는 것 같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거울을 보며 아침마다 체면을 걸었다.

 

그래, 오늘도 아침에 눈을 떴으니 회사에 갈 수 있어!
어젯밤을 세서 일했더니 몸이 좀 힘들어서 코피가 난 거야.
요즘 날씨가 서늘해져서 감기가 안 떨어진 것뿐이야.
요즘 스트레스가 많아서 피곤한 거야.

하지만 내 몸은 점점 말을 듣지 않고 체력이 고갈되어 바닥을 쳤다.
결국 병원을 가는 대신 차선책으로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 주었던 직장 선배들에게 몹쓸 거짓말을 한 후 원래 직장보다 업무 강도가 편한 곳으로 이직을 했다.
나의 사회생활에 아낌없이 도와준 선배들은 냉정하게 떠나는 나를 보며 화를 내기도 하고 굉장히 서운해했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당시에는 이 현실 도피가 병원을 안 가도 된다는 차선책이라고 믿고 싶었다.
다행히 새 직장의 사람들도 너무 좋은 사람들이라 업무에 적응하며 생활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매일 밤 두려움을 움켜진 채 시간만 흘려보냈다.

 

그리고 추석이 다가왔다.
나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지만 원래 고향은 대구이기 때문에 명절을 보내기 위해 대구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나를 본 가족들은 나이가 몇 살인데 관리도 안 하고 돼지처럼 살이 확 쪘냐고 폭풍 치듯 잔소리를 쏟아내었다.

 

그러나 엄마의 예리한 눈빛은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명절이랍시고 엄마와 함께 간 목욕탕에서 나의 멍울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동안 2배 이상 단단하게 커진 돌덩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심각성을 인지한 엄마는 추석 마지막 날 나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고 대구 이경외과로 향했다.

 

나는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병원으로 향하는 그 30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긴장을 많이 했다.
엄마는 나의 손을 꼭 붙잡고 계속 중얼거렸다.

걱정 마라, 아무 일도 아니다.

 

이건 나에게 하는 얘기인지, 엄마가 스스로 주문을 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엄마와 손을 잡고 함께 대구 이경외과 병원에 도착하였다.
꼼꼼하고 살가운 원장님이 직접 진찰하셨는데 멍울을 만져 보더니 급하게 간호사를 불러 바로 유방 X선 촬영부터 조직 검사까지 빠르게 진행하였다.

 

나는 그제서야 여자들이 왜 여성병 검사를 무서워하는지 알게 되었다.
유방 X선 촬영은 가슴의 살이란 살을 모두 끌어모아 복사기로 복사하듯 사정없이 찍어 눌렀는데 겨드랑이까지 찢겨 나가는 듯한 통증이었다.

 

원장님은 X선 결과 사진을 보더니 멍울이 상당히 크다는 판단에 맘모톰 조직 검사까지 진행하였다.
맘모톰 조직 검사는 유방 X선 촬영보다 더했다.

 

내 팔뚝만 한 바늘을 찔러 넣고서는 하나, 둘, 셋을 세며 총을 쏘듯 충격을 가하여 멍울 조직을 여러 번 떼어냈는데 마취를 했음에도 너무 아파서 찍소리도 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
검사가 끝나고 정신줄을 다잡는 동안 원장님은 엄마와 마지막 대화를 하며 일주일 후 면담시간을 예약하였다.

 

나이도 젊은데 괜찮을 겁니다. 설마 나쁜 쪽이겠어요?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요.

명절이 끝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나는 덤덤하게 일주일의 시간을 기다리며 회사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면담을 약속한 일주일보다 훨씬 더 빨리 결과를 알리는 전화 한 통이 왔다.
병원의 간호사는 전화로 결과를 얘기하기 꺼려 하였으나 내가 서울에 있다는 말에 조금 에둘러 말해주었다.

결과가 좋지 않아요, 얼른 병원으로 와서 원장님과 면담하세요.

 

역시나 유방암 판정이었고, 현실 도피 생활은 끝이 났다.
슬픈 예감은 언제나 현실이 된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간호사에게 지금 대구에 계산 부모님이 나 대신 지금 병원을 방문 거라는 말을 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3초도 되지 않았을까?
머릿속을 휙 하고 지나가는 한 가지 걱정이 스쳤다.

나 아직 돈 없는데... 돈 많이 들면 어쩌지?

그 많고 많은 걱정 중에 왜 하필 창피하게 돈 생각이 먼저라니..
전화를 받을 때도 칼로 찌르는 듯한 멍울의 통증이 왔지만 내 머릿속에는 마치 멈출 수 없는 회전목마처럼 돈돈돈, 돈 생각만 맴돌았다.
나는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 죽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고, 심하게 떨리는 손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병원에서 전화가 왔어, 결과가 나쁘대.
지금 바로 병원으로 오래.
.................................

통화는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엄마는 그 즉시 바로 대구 이경외과로 달려가 원장님과 치료 과정에 대해 면담을 했고, 나는 회사 대표님께 내 상황을 알리며 조용히 주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2시간이 지나고, 엄마는 면담을 마친 후 나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엄마는 정신없이 울먹였지만 뭔가 계획이 다 짜여 있는 사람처럼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너 대구 올 필요 없어.
큰 병은 지방보다는 무조건 서울에서 치료하는 거야!
엄마가 조직 검사 결과 다 가지고 서울로 올라갈게. 
이미 삼성서울병원 암 센터에 예약 다 해놨어.
그리고 혹시라고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너 암보험, 실비보험 다 있으니까 그걸로 다 해결할 수 있어.
그냥 거기서 마음 편히 먹고 먹고 쉬고 있어.
다 괜찮아. 엄마가 다 해결할 거야!

순간 빙빙 돌던 내 머릿속 회전목마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엄마는 역시 나를 구해줄 슈퍼맨이자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렇게 돈 걱정을 멈추고 투병 생활을 위한 긴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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