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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유방암 투병기

[항암일기]첫 항암 후 나에게 찾아온 변화

by 정이모음 2021.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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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주에 1번씩 삼성서울병원 암센터에서 항암주사를 맞고 대구 집에서 요양했다.
첫 항암 후 찾아올 내 몸의 변화에 대해서 의사와 간호사가 입이 아프게 설명을 해줬지만 역시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너무나 낯선 것들 투성이었다.

 

첫 항암주사를 맞은 다음날 아침에 나는 빨간 피 색깔의 소변을 보았다.
3일 정도 빨간 소변을 보고 나서는 딸꾹질, 방귀, 트림 등의 생리 현상을 조절하기가 힘들었다.
화장실을 가는 횟수가 급격히 많아졌고, 소변을 본 후에도 항상 덜 본 것처럼 찝찝했다.

 

물을 많이 마셨지만 그 많은 물이 내 몸속 어디에 다 저장이 되어 있나 싶을 정도로  소변을 시원하게 볼 수 없었다.
그 물도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먹을수록 왜 이리 비린내가 나는지 물만 먹어도 역겨움이 위에서 올라왔다.

 

2주 정도가 지나면 서서히 평소처럼 소변을 보면서 상태가 괜찮아졌지만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에는 정해진 규칙처럼 매번 이 상태를 반복했다.

몸은 날이 갈수록 부었고, 면역도 급격하게 떨어졌다.
항암주사 후 3일째부터는 급격히 몸이 나빠지는 신호가 왔다.
기운이 없어서 툭하면 고꾸라져 잠이 들었다.

 

배는 고팠지만 위가 밧줄에 묶인 것 마냥 답답해서 정작 식사를 잘 하지 못했다.
살아보겠다고 억지로 먹은 음식은 모두 토해내기 바빴다.

 

밤에는 위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날은 토하다가 토할 것이 없으니 노란 위액을 토하다가 나중에는 연두색의 액이 나왔다.

 

그리고 난 후 마지막 약간의 피까지 모두 토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밤 하필 가장 고요한 시간에 늘 반복되는 통증이 무서웠다.
가족들을 깨울까 봐 미안해서 조용히 방을 나와 화장실 앞에서 숨죽인 채 쭈그려 앉아 있는 날이 많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참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나는 소갈비찜과 보쌈을 좋아했다.
남들은 항암 시작 후 고기를 피하고 풀만 먹고산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고기를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꾸준히 먹어댔다.
집에서는 나를 위해 늘 질 좋은 고기를 삶아다가 수육과 채소로 준비해 두었다.

 

여담이지만 내가 1점 먹을 때 아빠와 남동생은 10점씩 먹어댔고, 우리 집 강아지도 나보다 더 잘 먹은 듯하다.
나는 먹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컨디션이 괜찮다 싶을 땐 양껏 먹어댔다.
그렇게 고기를 먹은 날에는 식사 후에 마인드 컨트롤을 한답시고 중얼거렸다.

오늘 먹은 소불고기는 비싼 거야, 토하면 안 돼!
오늘 수육은 너무 잘 넘어갔으니 소화도 잘 시킬 거야.

나의 정신력이 부족했는지 내 몸은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구토 증상으로 그 질 좋은 고기들을 경건히 떠나보냈다.
그나마 운이 좋은 날에는 먹은 거 반만 토하고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도 고기 맛은 봤잖아..
안녕,, 비싼 소고기.. 다음에는 꼭 맛있게 먹어서 다 소화시켜 줄게

그러나 정작 나의 식사를 방해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항암 치료 시작 전 손보지 못한 사랑니였다.
썩어가는 사랑니 때문에 잇몸이 퉁퉁 붓고, 다른 치아들까지 약해져서 아침마다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대신 휴롬으로 사과, 바나나, 당근, 양배추 등을 넣어 갈아만든 주스 한 잔으로 식사를 대신했다.
본의 아니게 건강식으로 먹었지만 맛은 달달하니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과의 상큼 달콤함이 비린 맛을 잡아주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조금의 우유와 견과류까지 모두 넣어서 매일 즐겨 마셨는데 이게 내 몸에서 유일하게 소화를 할 줄 아는 음식이었다.

사실 나는 항암치료를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작은 치료들을 모두 간과했다.
혹시나 항암치료를 시작하는 분들이라면 부분이든 전신이든 단 1%라도 마취가 필요한 치료는 먼저 마치고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나는 치과에서 사랑니와 충치치료를 미리 받지 않아 크게 후회한 케이스이다.
항암도 고통스러운데 밤낮으로 구토와 치통에 잠도 못 자고 사람 구실도 못하는 바보가 되었다.
항암 치료 중에는 면역이 엄청 떨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치과를 포함한 모든 시술이 위험해서 아무도 나의 사랑니를 봐주려는 곳이 없었다.

 

결국 항암주사, 수술, 방사선 치료까지 모두 끝날 때까지 어떻게 버티다가 1년이 지나서야 스케일링과 사랑니 발치, 충치 치료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나는 정말 환자의 외관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항암 주사를 맞고 정확히 보름이 되니 머리카락이 한 주먹씩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보다 두피가 너무 아파서 잘 때도 앓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빠질 때도 절대 깔끔하게 빠지지 않고 머리에 손만 갖다 대면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빠지기 때문에 보름이 되기 전까지 고민이 좀 되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어떻게 마음의 준비를 할까 생각하다가 집 앞 미용실로 달려갔다.
당시 내 머리카락은 가슴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였기에 그 긴 머리가 듬성듬성 빠지면 내 스스로가 더 놀라 감당이 안 되는 것보다는 미리 빡빡이로 삭발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어차피 젊은 날에 언제 내가 삭발해 보겠는가?
이 기회에 해 보자 싶어 미용실 원장님께 사정을 얘기하고 삭발해 달라고 했다.

 

사정을 들은 원장님은 얼굴이 굳은 채 아무 말 없이 삭발이 아닌 커트머리로 잘 다듬어 주셨다.
끝내 이발기를 꺼내 들지 않은 원장님은 우리 둘이 함께 비친 거울을 보며 내 어깨에 살며시 양손을 얹고 얘기를 했다.

젊은 사람이 크게 아픈데도 씩씩하게 견뎌내서 내가 다 기분이 좋아요.
오래 싸워야 하는 병이에요.
길고 지루해서 앞으로 힘든 날들 연속일 테니 당장 며칠 먼저 그 힘든 감정을 미리 감수할 필요는 없어요.
빠질 때 빠지더라도 며칠 동안 우울해하지 말고 더 색다른 스타일로 기분 내고 다녀요.

나는 거울을 보며 굳었지만 뭔가 내 속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너무 고마웠다.
나 혼자 감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식으로도 응원을 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그 길로 나는 엄마와 손을 잡고 나와 대형마트로 향했다. 
많이 걸어 다니지도 못했지만 원장님 말대로 새로운 커트머리에 기분 좋게 모자를 쇼핑했다.
커트머리라고 해도 빠지기 시작하면 감당이 안 될 것 같으니  실내용, 비니, 외출용 모자를 여러 개 샀다.

그러고도 걱정이 됐는지 엄마는 가발을 사야 하지 않겠냐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방실방실 웃으면서 안 사도 된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서 새로 산 모자들을 써보았다.
호빵처럼 부어버린 얼굴에 단정히 다듬어진 커트머리를 보며 원장님이 해준 말이 계속 생각이 나서 또 웃어버렸다.
모자를 바꿔 쓸 때마다 호빵이 더 못생겨 보였지만 이렇게 웃겨도 모자를 쓴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 철이 없다 해도 괜찮다.
너무 슬퍼할 필요 없다.
이제 곧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
겨울에는 모자를 2~3개 겹쳐 써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가발은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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