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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유방암 투병기

[항암일기]다시 대형병원 암센터에서 검사를 받으며...

by 정이모음 2021.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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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초.
나는 대구 이경외과에서 했던 조직 검사 결과를 들고 삼성서울병원 암센터로 갔다.
역시 대형병원이라 검사 일정이 체계적이었고 나는 간호사가 알려준 검사 일정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당장 하루 만에 의사를 보고 진료를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환자 등록부터 MRI와 CT, PET, 혈액, 초음파 등 온갖 검사를 추가로 더 받아야 했다.

 

근데 검사보다는 대체로 검사를 대기하는 시간이 더 길었기에 긴장이 풀리고 지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주변을 자연스레 둘러보게 되었다.

내 옆방 검사실에는 소아암으로 힘든 투병을 하면서도 초콜릿이 먹고 싶어 엄마를 조르는 8살짜리 꼬마,
내가 검사실 복도에서 대기할 때 아픔을 참지 못해 의사에게 소리 지르고 짜증 내던 노란 머리 외국인 언니.
내가 잠시 화장실에 갔을 때 환자의 눈을 피해 숨죽여 울던 어떤 중년 여성.

모두가 사정이 안타깝고 딱한 건 매한가지였다.
나는 병원 입성 하루 만에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게 된 것은 그들의 걱정거리 0순위는 나의 걱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치료비, 돈이었다.

 

우리나라는 암환자를 포함한 중증 환자들에게 전체 치료비 중 5%만 지불하도록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
그러나 막상 치료가 시작되면 내가 그러하였듯 처음에는 환자에게 좋다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추가 비용은 생각하지도 않고 모든 옵션들을 상향 선택한다.

 

누가 시킨 적은 없다. 

그래도 일단 살고 봐야 하니까 좀 더 좋은 약을 쓰고, 선택 진료를 추가하고, 몸에 좋다는 건 죄다 찾아 먹는다. 
집안 기둥뿌리를 통째로 뽑아내는 바닥 다지기 공사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다들 서서히 빠져나오지 못할 굴레에 빠져든다.
그렇게 하루, 한 달, 1년 그 이상..

 

긴 병에는 장사가 없다.
치료비 5%+@ 추가 비용은 엄청나게 불어나 환자와 보호자들의 숨통을 서서히 조른다.
정성을 들인 만큼 환자의 상태가 호전된다면 그것만큼 보람 있는 일도 없겠지만 투병 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다.
1년 사계절이 지나고 또다시 지쳐가는 사계절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집안의 분위기는 어둠의 아우라가 뿜어난다.
환자와 가족들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지만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리고 그 현실은 병원 수납창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치료비 수납을 위해 번호표를 뽑고 내 순서를 기다리는 중에 앞서 수납창구 직원과 얘기를 나누며 여러 장의 신용카드를 만지작거리는 한 노부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떤 상황인지는 대충 할아버지의 뒷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수납 직원은 아주 친절했지만 노부부 사정까지는 해결해 줄 수 없었고, 다만 병원 내에 있는 사회복지센터로 그들을 안내했다.
거기는 치료비 관련하여 미쳐 국가 복지 관련하여 알지 못해 복지제도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병원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어떻게 해결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할아버지는 직원 안내에 따라 거동도 시원찮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은 채 천천히 그곳으로 갔다.

 

나는 목숨이 10개도 넘고, 죽음은 나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던 20대 젊은 철부지였다.
당시에는 보험이 정말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노부부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근데 동시에 엄마가 무리해서 넣어둔 생명보험과 실비보험이 떠오르며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보험이 있어서 다행이야. 
저 정도가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야?

나는 악마일까?
공감 능력이 없는 사이코인가?
생각해 보니 이때뿐만이 아니라 검사할 때도 그랬다.

뭐야? 나도 저렇게 해골 모습으로 링거 주렁주렁 달고 침대에서 죽어가는 거야?
아... 그래도 난 아직 저 정도는 아니지. 다행이다.

나는 암센터의 많은 환자들을 보면서 앞으로 닥칠 두려움보다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안도하고 있었다.
수없이 다행이다를 되뇌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처음이라 그런 걸까?

 

그러기에는 너무 잔인한 생각이었다.

남의 더한 불행을 보고 내가 더욱 안도하게 된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순간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병원 복도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나보다 상태가 심각하게 안 좋은 다른 환자들이 왔다 갔다 했다.​

나는 8살 꼬마보다 더 행복한 어린이였고,
노란 머리 외국인 언니처럼 검붉은 종양이 피부 곳곳에 보이지도 않았고,
화장실에서 숨죽여 우는 중년 여성과 달리 우리 가족은 아직 정신적으로 단단했다.

나는 이렇게 그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다행이다'라는 주문을 걸면서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차피 망한 인생, 다들 거기서 거기인데 괜한 정신 승리였다.

 

그러나 나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아 남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의 불행을 보며 두려움과 위로를 동시에 받는 곳, 그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곳은 바로 암병원이었다.

암 판정을 받을 때 사회생활 단절과 돈만 생각했는데 그런 내가 우스워 보일 만큼 감히 상상도 못한 다른 장르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은 늘 생각보다 잔인하다.

삼성서울병원에서 아직은 여유롭게 검사중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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