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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이야기/독서, 영상 리뷰

오랜만에 본 영화 '한산:용의 출현'

by 정이모음 202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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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비가 그치고 서늘해진 공기와 함께 약간 공허했던 밤이었습니다.
저는 항암 치료 때 쓴 제 일기장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아프고 힘들고 죽겠다, 아프고 힘들고 죽겠다.
앞이 캄캄하다.
나는 이대로 빌빌대면서 살다가 죽는 건가?

내용은 보나 마나 뻔한데 왜 자꾸 들여다보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마침 이 날 일기장을 무작위로 펼쳐 보았던 하루도 위장이 너무 아파 먹을 걸 다 토해내고 숨쉬기에도 버거운 날이었습니다.
비는 억수같이 오고, 잠도 다 잤고..

하는 수 없이 동생이 사다 놓고 읽지 않아 먼지만 쌓여가던 책을 주워 읽기 시작했는데 별 기대 없이 봤다가 위장이 아픈 걸 잊고 마지막 장까지 단숨에 읽을 만큼 재밌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책은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였고, 이순신 장군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지금은 책 내용이 잘 생각이 나진 않지만 그때 느꼈던 여운은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칼의 노래'를 읽어 보고 싶었지만 근처 교보문고를 방문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책 재고도 없었습니다.
근데 책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한산:용의 출현' 영화가 끝물이지만 아직 상영 중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한산: 용의 출현
나라의 운명을 바꿀 압도적 승리의 전투가 시작된다!  1592년 4월,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후 단 15일 만에 왜군에 한양을 빼앗기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다. 조선을 단숨에 점령한 왜군은 명나라로 향하는 야망을 꿈꾸며 대규모 병역을 부산포로 집결시킨다. 한편, 이순신 장군은 연이은 전쟁의 패배와 선조마저 의주로 파천하며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도 조선을 구하기 위해 전술을 고민하며 출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앞선 전투에서 손상을 입은 거북선의 출정이 어려워지고, 거북선의 도면마저 왜군의 첩보에 의해 도난당하게 되는데… 왜군은 연승에 힘입어 그 우세로 한산도 앞바다로 향하고, 이순신 장군은 조선의 운명을 가를 전투를 위해 필사의 전략을 준비한다. 1592년 여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한 조선의 운명을 건 지상 최고의 해전이 펼쳐진다.
평점
8.5 (2022.07.27 개봉)
감독
김한민
출연
박해일, 변요한, 안성기, 손현주, 김성규, 김성균, 김향기, 택연, 공명, 박지환, 조재윤, 윤제문, 박훈, 박재민, 이서준, 김재영, 윤진영, 김강일, 이준혁, 김민재, 김구택, 손경원, 안성봉, 이운산, 김영웅, 공정환, 배현성, 김대명, 정예훈, 현봉식, 김한민, 김명곤, 현직, 박인국, 김한솔, 함진성, 고한민, 이상군


개봉한 지는 꽤 시간이 지났는데 이전 시리즈 1부 '명량'의 단점을 보완하여 훨씬 재밌다는 평가가 다수였습니다.
아쉬운 대로 '칼의 노래' 책은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고 영화도 바로 예매를 하였습니다.

영화관은 걸어서 20분이면 도착하는 곳이었는데 심야 영화라 그런지 관람 인원은 겨우 5명뿐이었습니다.

코로나 전에는 영화관을 놀이터 가듯 자주 가서 여러 장르의 영화를 즐겼는데 이제는 영화관 티켓 비용이 얼마인지도 모를 정도로 낯선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롯데시네마 칠곡 '한산:용의출현' 상영관

영화 '한산:용의 출현'은 1부 '명량' 때보다 좀 더 젊은 시절 이순신 장군님의 1952년 한산도 대첩을 그렸습니다.

한국인이라면 결과를 뻔히 다 알면서도 보게 되는 이야기인데요.
특이하게도 이번에는 일본인 장수 와키자카의 시각으로 흐름을 이끌어낸 부분이 많았습니다.

배우 변요한이 연기한 일본인 장수는 침략을 일삼는 마냥 나쁜 놈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명분을 갖고 진중하게 전쟁에 임하는 야망 있는 전략가 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일본 입장에서 두려움의 대상이자 반드시 제거해야만 하는 이순신 장군의 위상이 적에게 얼마나 큰 공포감을 주었는지 생생하게 와닿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인간 사는 곳이 다 똑같듯이 일본의 내부에도 정치적 갈등과 거짓 협력 등의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어 흥미로웠습니다.

'한산:용의 출현' 중 인본인 장수들 장면 스틸컷

1부 '명량'에서는 조선인들의 각자 사연과 한의 정서가 강조되었다면 이번 2부작 '한산:용의 출현'에서는 신파적인 부분을 싹 걷어내고 전쟁의 전술과 심리게임에 집중되어 해상 전투씬에 엄청난 공을 들였습니다.

각자가 가진 패를 서로가 알고 있어 더욱 신중했던 심리전은 영화 초반에 다소 지루하다는 평가를 만들긴 했지만 원래 폭풍 전야가 가장 고요하듯 마지막 해상 전투신을 휘몰아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장면들이었습니다.

물살이 세고 좁은 길목으로 적을 유인하고,
단점을 보완하여 더욱 업그레이드된 해저 괴물 거북선 출현으로 적을 아비규환으로 만들며,
수성인지 공성인지 아군도 생각하지 못했던 바다 위의 성 '학익진' 전법이 완성되며 승리에 정점을 찍는다.

누구나 다 아는 내용으로 전투씬이 약 50분 넘게 계속되었지만 흡입력이 좋았고 통쾌함까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화 '한신:용의 출현' 중 학익진 부분 스틸컷

생각해 보면 저는 어릴 적 교과서 문장 위주의 교육을 받으면서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펴는 듯한 전법이라고 글자로만 외웠을 뿐 그 전법이 승리로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곱씹어 상상해 본 적이 없기에 가슴에 와닿는 전율은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님의 엄청난 고뇌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그리고 마지막 해상 전투씬이 '학익진' 전법으로 완성이 되는 과정을 남이 잘 만든 영상으로 보고 나서야 조상들의 위대한 업적과 숭고한 정신 같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요.
교과서에 한 문장으로 요약되어 줄줄 읽고 외우기 바빴던 어릴 적 역사 교육의 한계와 참담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영화 '한산:용의 출현' 중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구상 장면 스틸컷

그리고 이번 영화를 통해 확실히 느낀 것은 오감으로 느끼는 감정들은 고통마저 무뎌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야 김훈 작가의 매력적인 문체에 빠져 밤새 '칼의 노래'를 읽던 내가 이해가 되었습니다.

병원 생활을 할 당시 가장 이해를 할 수 없었던 것이 내용 뻔한 드라마를 보면서 매일 울고 웃으면서 화를 내는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아파 죽을 것 같아서 밥도 못 먹겠다는 사람이 드라마를 보고는 주인공을 욕할 힘은 있다는 게 나를 더 어이없게 만들었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니 장르만 다를 뿐 그들은 나보다 감성이 더 풍부하고 자극을 오감으로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참고로 나의 오감을 자극하는 장르는 현대 드라마보다는 전쟁, 서사, 역사물이 다수였습니다.

한산:용의 출현 메인 예고편

다시 영화로 돌아와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를 꼽아보았는데요.
영화 초반에 일본 장수 와키자카가 겁에 질린 자신의 부하를 죽이기 전 말한 대사입니다.

'두려움은 전염병이다.'

저는 병원생활을 오래 한 입장에서 너무나 공감이 되었는데요.
그러나 동시에 1부작 '명량'에서 이 공포심을 압도하는 이순신 장군의 엄청난 대사가 기억났습니다.

'만일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현대 언어로 각색이 된 문장이지만 보통 사람에 비해 몇 수나 앞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잘 표현한 대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 영화 상영 시작 때 뭐하고 이제야 영화 상영 끝물에 쓴 '한산:용의 출현' 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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