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건강/유방암 투병기

[항암일기] 친구들의 좋은 소식

by 정이모음 2022. 6. 25.
728x90

항암 치료 2차 중반이 넘어가고 나의 일상은 굉장히 단조로워졌다.
하루의 특별한 일정은 없었다.
그저 오전에 헬스장에서 간단한 요가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강아지와 산책을 했다.
책도 보고 TV 예능도 봤다가 과일과 요거트도 챙겨 먹었다.
무언가 성취보다는 하루를 무사히 무탈하게 지내는 따분한 삶 그 자체였다.

매일 지키고자 했던 계획들과 파이팅 넘치던 다짐들은 다 부질없었다.
피곤함과 무기력함에 모든 게 귀찮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어느새 2~3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었다.

항암 치료 1차 때에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응원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이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 바쁘니까...
나도 혼자의 긴 시간에 익숙해져 갔다.

그리다 오랜만에 어릴 적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저녁 6시가 넘어 외출 준비를 하였다.
거울을 보니 환자가 된 내 모습이 초라하긴 했지만 얼굴에 뭔가 혈기가 돌면서 설레기 시작했다.
그래.. 나 20대였지...
어릴 적 친구들이니 내 겉모습은 친구들이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며 평소에 입던 외투를 2겹으로 껴입고 길을 나섰다.

나는 카페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따뜻한 라떼를 홀짝이며 친구들을 기다렸다.
내가 아픈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가 어두워질까 봐 엄마와 백화점에서 산 비싼 모자보다 서문시장에서 산 2만 원짜리 모자가 더 예쁘더라는 이야기, 우리 강아지랑 산책하며 생긴 에피소드, 요즘 읽고 있는 책 같은 주제들로 얘기해 주고 싶었다.

15분이 지나고 한 친구가 웃으며 카페로 들어왔다.
내가 아픈 줄은 알았지만 머리까지 다 빠질 정도의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줄 몰랐던 친구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래도 1년 만이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친구의 회사 생활, 평소 생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웃고 떠들었다.
친구는 남자 친구와의 결혼도 준비하고 있었다.
듣다 보니 재미도 있고 시간이 잘 가고 있었다.

10분이 더 지나니 또 다른 친구가 도착했다.
역시나 다소 과하게 외투를 껴입고 있는 나를 보며 어색하게 인사했지만 곧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이 친구도 남자 친구와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축하할 일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나만 그 자리가 불편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관심사는 결혼 준비였기 때문에 어느새 결혼식장, 드레스, 혼수 같은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고 인사만 했는데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나의 근황이 궁금하지 않았고, 나는 아직 결혼 준비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질 거라는 생각은 괜한 걱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용히 라뗴를 다 마시고 1시간 반이 넘어가도록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아름다운 앞날을 꿈꾸는 그들의 해맑은 얼굴을 보며 화가 났다.
너희는 너무 매너가 없다.
너희는 너무 이기적이다.
친구 같은 소리 하네.. 나쁜 년들...

화가 나서 그런 걸까?
몸이 너무 추웠고 온 몸에 열이 나고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친구들의 대화 도중 몸이 좋지 않아 일찍 들어가겠다고 했더니 오랜만에 만나 얘기하는 거 재밌는데 왜 먼저 가냐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몸이 너무 아프다며 나와버렸다.

30분 동안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질질 짜면서 울었다.
바람도 부는 겨울밤이라 안 그래도 못생겨진 빵떡 같은 얼굴이 꽁꽁 얼어버렸다.

강아지 얘기도, 새로 산 모자도 모두 쓸모없었다.
나의 평범한 일상과 친구들의 평범한 일상에는 어느새 확실하게 선이 그어져 내가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달라진 격차만 확인했을 뿐이다.
나의 인생은 철저히 실패했다는 패배감만 들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노력을 해도 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비관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자꾸 나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빌어먹을 몸뚱이로 밥이나 축내면서 겨우 숨 쉬고 시간만 보내는 병신이다..'

나는 스스로 부정적인 생각들로 머릿속에 꽉꽉 채운 대가로 그날 밤에 지옥을 맛보았다.
온몸에 열이 불덩이었고, 먹었던 것들을 피와 함께 모두 토했다.
쥐어짜는 위장 통증, 칼로 휘젓는 것 같은 가슴 통증, 팔다리 저림, 저혈압으로 인해 앞이 보였다 흐렸다 하는 바람에 거실 바닥을 기어 다녔다.
온몸이 붓고 이를 너무 악물어서 치아도 흔들렸다.
나는 병원에서 증상이 있을 때 먹으라던 온갖 위장약, 통증약들을 먹어 치웠다.

내가 새벽에 3시간을 가까이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우리 가족은 거짓말처럼 아무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오히려 나 빼고 모두가 평안한 밤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너무 지쳐서 거실 바닥에 쭈그린 채 강아지를 안고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자 할머니가 아침밥 먹으라고 아무렇지 않게 나를 깨웠다.
이불도 안 덮고 춥게 거실 바닥에서 잤다고 잔소리를 들었다.
밥을 겨우 먹고 피곤해서 뭉그적거리면서 설거지를 했더니 엄마는 헬스장 요가 수업 안 갈 거냐며 엄살 부리지 말고 빨리 준비하라고 나를 구박했다.

내가 이 집안 축구공인가?
밤새도록 나라는 존재에 대해 철학적인 고찰을 하느라 얼마나 피곤한데 겨우 요거트가 딸기맛이니, 저녁에 삼겹살을 먹을지 목살을 먹을지, 강아지 목욕을 오늘 하냐 내일 하냐로 타박을 받다니...
짜증을 냈더니 성질머리 못 돼 처먹었다고 또 혼이 났다.

몸은 피곤했지만 운동하고 엄마와 시장 가서 포도맛 대신 딸기맛 요거트와 수육 해먹을 삼겹살도 사고, 강아지 목욕도 시켰다.
오후 4시가 넘어가니 완전히 퍼질러 앉아 붕어빵과 군고구마를 맛있게 먹어 치웠다.
강아지 입에도 나에게 반이나 뺏어 먹은 딸기맛 요거트가 잔뜩 묻어 있었다.
하루 종일 바빠서 그런가 아무 잡념도 없었고, 세상만사 비관적인던 병신은 붕어빵 한입에 그냥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전날 만났던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심장도 뛰고 손이 떨려서 안 받고 싶었다.
다시 어제의 기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받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손이 너무 떨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통화 버튼을 실수로 눌러 버렸다.
아무튼 손가락이 문제다.
친구는 집에 잘 들어갔냐며 얘기를 꺼냈고, 나도 아무렇지 않게 잘 들어왔다고 대답했다.
친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제 본인들이 나에게 너무 무례했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암투병이 이렇게 심각한 줄 몰랐고, 어설프게 위로하면 그게 더 기분 상하게 할 것 같았다고..

"너의 상황과 너무 동떨어진 얘기만 해서 미안해. 근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래, 무슨 말이 위로가 되고 괜찮은지 나도 모른다.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 준 걸로 됐다.
나는 화제를 돌려 지금 붕어빵 먹는데 맛있어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아침에 요가 수업부터 강아지가 내 요거트 반이나 뺏어먹은 이야기까지 나의 하루를 얘기했더니 친구가 웃었다.
웃은 김에 나는 솔직하게 친구에게 남은 응어리를 꺼내어 보았다.

"너는 좋겠다, 나는 이제 너랑 완전히 다른 일상이네. 평범함과는 굿바이다!!"

근데 친구가 의외의 대답을 했다.

"뭐라카노? 니는 원래 평범한 애는 아니었다!
어릴 적에도 우리 중에 니가 제일 튀었다.
상황이 좋든 안 좋든 고르고 골라 니가 제일 특이한 인생을 사는 애였다.
뭐 이제 와서 평범한 거 찾노?"

아... 그.. 그랬구나..
아픈 건 아픈 거지만 남들과 비교하지 말라고 꾸중을 들었다.
나는 이 날의 메인 축구공이 확실했다.

"니가 뭐 좋은 일들 있을 때 나는 진짜 니 축하해줬다.
어제 상황은 우리가 좀 그랬다마는 이때까지 니가 내보다 축하받은 일 많았던 거 알제?
그거에 비하면 나는 어쩌다 한번 생긴 좋은 일이니까 삐딱선 타지 말고 축하해도!
모르면 좀 물어보고 니가 그 주제에 낄 생각도 해야지, 그대로 혼자 뒷짐 지고 빠지는 것도 모양새 안 좋데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친구에게 인간관계 처세술에 대해 1시간 동안 일장연설을 들으며 정신교육을 받고 나서야 통화가 끝났다.

결국... 사과할 사람은 나였나?
나는 아직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넓게 바라볼 줄 모른다.
오히려 환자라는 감정에 몰입되어 친구들에게 배려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오만했다.
나는 아픈 와중에 밥도 축내고 숨도 겨우 쉬었지만 그동안 내 인생에 놓친 것들도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에 카페에서 만난 친구

* TMI 후기
나는 당시 친구의 결혼식에 참여하였고, 그 친구는 아들 하나를 낳고 잘 살고 있는 중이다.
현재는 다른 지역에 살고 있어서 자주 못보지만 그래도 종종 연락을 하며 잘 지내고 있다.
만나면 어김없이 나에 대해 쓴소리도 아끼지 않는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