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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유방암 투병기

[항암일기] 2차 항암 주사를 맞으면서..

by 정이모음 2022.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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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7일 수요일.

서울삼성병원에서 2차 항암주사를 맞는 날이었다.

 

암병원은 늘 기다리는 게 일이다.

항암주사는 구경도 못했는데 대구에서 서울까지 4시간 장거리 운전으로 허리에 파스를 도배 중인 엄마와 나 대신 진료비 납부에 약국, 편의점, 은행까지 여기저기 심부름으로 정신없는 남동생도 진이 빠지기 시작했다.

올 때는 환자1명과 보호자 2명이었지만 갈 때는 환자가 1+2명이 되어 버리는 신기한 곳이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빈 의자를 찾아 앉아서 동생이 갖다 준 음식을 먹고 기다리다 졸기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중간에 의료진이 불러서 1차 항암주사 후 3주간 어땠는지 영양상태를 상담했는데 나는 다행히 알레르기나 몸의 거부반응 같은 변수 없이 순조롭게 진행된 편이라고 한다.

 

이상하다.

난 분명히 머리 빠지고, 토하고, 졸리고, 힘들었는데 내 눈앞의 상담사는 원래 항암 진행과정이라며 치료가 잘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그 순간 상담사의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잘 되긴 뭐가 잘 돼!! 힘들어 미치겠는데!! 웃어? 웃겨?!!

 너네 병원 놈들, 치료 끝나고 두고 보자,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

 

그렇게 나는 눈으로 욕을 하고 있었지만 내 입은 조신하게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할 뿐이었다.

소심해서 할 말도 못 하고 나온 쭈구리 주제에 병원 구석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지나가는 이들 중에서도 나처럼 지친 이들도 있었고, 함박웃음을 띠며 옆사람과 수다로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암병원에서 뭐가 그리 즐거울까?

가만 생각해 보니 의료진, 병원 관계자들에게는 이 신기한 곳이 일상을 보내는 직장일 뿐이었다.

 

'너네는 좋겠다~ 이 와중에 웃음이 나와서....'

 

그렇게 나는 완전히 삐뚤어져 심보가 베베 꼬여버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병원은 오전 11시가 좀 넘어서 도착했는데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야 항암주사 병실 침대를 배정받았으니 많이 지치기도 했다.

 

침대에 눕기 전 나는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볼일을 보면서 눈앞에 보이는 화장실 주의 문구 아래의 명언 한 문장을 읽게 되었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다.'

 

오늘 왜 이러지?

이 명언을 고른 사람은 나에게 무슨 의미를 전달하려고 그런 거지?

이런 글은 암센터 환자들에게 말하기엔 너무 무겁고 가슴을 짓누르는 문장이 아닌가?

밖에 떠들고 웃으며 직장인에게는 하루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최고의 명언이긴 하네...

이 화장실 직원용인가?

 

멋진 문장이었지만 그토록 간절함에 여유롭게 넘어가기엔 나는 너무 예민했다.

고로 피해의식에 젖기에는 최적의 기분이 완성되었다.

누구 하나만 걸리면 쥐 잡듯 잡을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왜 그렇게까지 정신이 무너졌는지는 모르겠다.

 

완벽한 염세주의자로 역변한 나는 화장실을 나와 검은 아우라를 뿜기면서 배정된 침대로 향했다.

나의 침대는 6인실 병상에 있었다.

항암 주사는 다들 편하게 누워서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다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병상 근처 복도 반을 지나는데 리클라이너 같은 의자에 앉아서 나보다 더 시커먼 아우라를 풍기며 항암주사를 맞는 환자들이 북적거렸다.

침대가 배정된 나와 무슨 차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상만사 비관에 차 있던 표정은 어디 가고 갑자기 숙연해졌다.

우리나라의 암환자가 정말 차고 넘칠 만큼 많다는 것을 다시 체감하면서 자꾸 오늘을 살고 싶었던 어제 죽은 이에 관한 화장실 문구가 떠올랐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저들과 나는 똑같이 내일이 간절하다.

결국 인정하기로 했다.

나에게도 필요한 말이다.

죽어가는 내 몸도 내일을 붙잡고 싶다.

화장실에서 나온 지 10분도 지나지 않은 염세주의자는 변덕을 부리며 줏대 없이 변절자가 되어 저들보다 이기적인 결심을 하였다.

 

'그래, 내가 오늘은 마음이 좀 불편하지만 반드시 몸 회복하고 5년 후에는 웃으면서 저 문장을 써먹어야지!'

 

그러려면 항암주사 네가 필요하다. 

내 몸의 암세포를 얼른 다 찢어 발라버려라.

이런 생각까지 들면서 정신머리가 반쯤 미친 건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얼른 침대에 누웠다.

 

머리맡 수액 거치대에는 수면제와 빨간 항암제 2봉지, 항암제 독기를 씻어줄 식염수까지 모두 7개의 수액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간호사는 나의 말초 삽입 중심정맥관 입구에 수액을 연결하고 수면제를 먼저 넣었다.

수면제로 나를 재우는 이유는 항암제의 독성이 너무 강해 구토나 거부 반응 증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거친 파도 같던 나의 정신은 수면제 한방으로 곧 잠잠해졌고 6번째 수액을 맞을 때 깨어났다. 

 

엄마와 남동생 옆에 서울에 거주 중이던 남자 친구도 있었는데 무슨 얘기를 한지는 모르지만 내가 몽롱한 상태에서 운동화를 사달라고 졸랐다고 했다.

그냥 계속 잠들어 있을 걸..

왜 어설프게 깨어나서 추하게 중얼거렸을까?

 

항암주사를 다 맞고 나니 별 다른 일없이 다시 차를 타고 4시간 동안 대구 집으로 향했다.

잠이 온다기보다는 몸이 많이 고단했다.

강아지를 안고 자다깨기를 반복했지만 그래도 다음 날 아침 7시가 되니 귀신같이 눈을 떴다.

 

역시 첫 항암 다음 날과 같이 빨간 소변을 보았고, 위장이 불쾌하지 않아서 양껏 먹었다.

밥도 과일도 디저트도 커피도 잘 먹어 치웠다.

낮잠도 자고 강아지와 산책도 했다.

 

특별한 기분이나 마음가짐은 들지 않았다.

그저 2차 항암주사를 맞고 다소 익숙해진 3주 사이클 버티기 도전이 다시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삼성서울병원 암병원 1층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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